2009년 11월 29일
절벽처럼 늪처럼
슬럼프는 언제나 그렇게 나타난다.
일직선으로 길게 뻗어있던 길이 어느순간 갑자기 사라진다. 정신차려보면 눈앞이 휑하다. 한 발자국 앞에 있어야 할 땅이 보이지 않는다. 또다시 아무런 전조도 없이 절벽이 나타났다는걸 깨닫는다. 예전에 봤던 그 절벽이다. 이 절벽은 내가 어떤 길을 걷고 있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나타나곤 했다. 앞으로 더 이상 가지 못하고 절벽 앞에 쪼그려 앉아 왔던 길을 생각하면 내가 험한 습지대를 걷던 중이었는지 활짝 펼쳐진 평야를 걷던 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보면 그저 눈앞에 있는 절벽만이 인식된다.
절벽이다. 깍아지른 절벽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안개가 있어도 없어도 건너편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발 밑을 내려다보다보면 저 골짜기에 빨려들어갈것만 같다. 아니나 다를까 내 발목은 골짜기 대신에 늪에 서서히 잠겨가고 있다. 그걸 알면서도 빠져나가려고 하지도 않는다. 빠져나가서 뭐하나? 앞이 절벽이라 더 나갈수도 없는데. 그렇게 늪은 귀찮은 저항도 받지 않고 아주 서서히 나를 잠식해 나간다.
늪이다. 나정도는 덮어버리고도 아무런 아무 변화도 없을것 같은 늪이다. 몸이 거의 잠겨가도 발에 바닥이 닿지 않는다. 어디까지 잠겨가는걸까 이 늪은 춥고 메말랐는데.
머리 자체가 돌아가질 않는다. 뇌가 통채로 바위가 되어있는 것 같다. 이성으로 내 행동을 컨트롤해도 감성이 받쳐주지 않아서 행동에 힘이 없다.
언젠가 이 늪에서 빠져나가서 절벽 외의 길을 찾을 수는 있겠으나 그 때가 언제가 될지는 전혀 알수가 없다.
# by | 2009/11/29 00:34 | 화원 끄트머리 | 트랙백 | 덧글(1)



